테드 번디가 다시 소환될 때,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들
실시간 검색어에 ‘테드 번디’가 오른 풍경은 낯설지 않다. 방송에서 연쇄살인범의 ‘실체’를 다루고, 온라인에서는 그의 외모와 ‘매력’이 회자되며, 어떤 글은 한니발 렉터의 모티브라는 식의 대중문화 서사를 덧입힌다. 그러나 우리가 소비하는 것은 범죄의 역사인가, 아니면 범죄자의 브랜드화인가. 테드 번디의 재등장은 단순한 범죄 다큐의 유행이 아니라, 범죄를 둘러싼 사회적 시선이 어디로 기울고 있는지를 묻는 경고음이다.
테드 번디는 1970년대 미국을 뒤흔든 연쇄살인범으로,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폭력과 살인을 반복했고 사후에야 더 많은 피해가 드러났다. 그가 악명이 높은 이유는 잔혹성만이 아니라 ‘정상성’으로 위장한 채 접근했다는 점에 있다. 제도와 공동체가 기대하는 ‘그럴듯한 인상’, 언변, 사회적 지위를 범죄의 도구로 삼았다는 사실은 오늘의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범죄는 골목의 어둠에서만 발생하지 않고, 때로는 가장 환한 자리에서 신뢰라는 이름으로 작동한다.
문제는 이 지점에서 대중적 서사가 흔히 미끄러진다는 데 있다. 일부 콘텐츠는 “잘생긴 연쇄살인범”, “연쇄 살인의 귀공자” 같은 표현으로 잔혹한 범죄를 ‘서사적 흥밋거리’로 재가공한다. 외모, 말투, 지능 같은 요소가 부각되는 순간, 범죄는 사회가 분석해야 할 위험이 아니라 소비자가 구경할 대상이 된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는 배경으로 밀려나고, 경계해야 할 구조적 신호들은 ‘개인의 기괴함’으로 축소된다.
한국 사회도 이 함정에서 자유롭지 않다. 최근 수년간 범죄 콘텐츠의 폭발적 증가와 함께 ‘사이코패스’라는 단어는 설명이 아니라 낙인이 되었고, 프로파일링은 사실상 예능적 장치처럼 소비되기도 했다. 전문 지식을 가진 이들이 범죄 심리를 해설하는 것 자체는 공익적 의미가 있으나, 편집과 연출이 자극을 향할 때 메시지는 쉽게 왜곡된다. “무섭다”는 감상만 남고, 왜 그런 범죄가 가능했는지, 어떤 경로로 피해가 확대됐는지, 수사·사법·지역사회가 무엇을 놓쳤는지에 대한 성찰은 사라진다.
더 위험한 것은 온라인에서 번디를 둘러싼 ‘매력’ 담론이 유통되는 방식이다. 외모나 카리스마를 이유로 범죄자를 선망하거나 ‘팬덤’처럼 소비하는 문화는 잔혹한 범죄에 대한 도덕적 감각을 마비시킨다. 동시에 “동서양 범죄자” 같은 단순화된 비교나 특정 집단을 폄훼하는 서사는 범죄를 이해하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범죄는 국적이나 인종의 본성으로 설명될 수 없고, 사회적 조건·제도적 허점·문화적 관용의 틈에서 반복된다.
테드 번디를 다시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공포를 재생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면역 체계를 점검하기 위해서여야 한다. 제작자는 범죄자를 ‘캐릭터’로 미화하지 않는 윤리 기준을 세우고, 피해자 중심의 서술과 예방 정보, 제도적 교훈을 동반해야 한다. 시청자 역시 자극적인 서사에 머물지 말고 ‘매력’이라는 포장지 뒤에 숨은 폭력의 본질을 직시해야 한다. 범죄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이 사회의 기준을 만든다. 테드 번디의 이름이 다시 떠오른 오늘, 우리는 범죄를 엔터테인먼트로 만들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를 새로이 다져야 한다.